2025
예배
2025년 5월호


14:14

예배

여러분과 저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 박사로 일컬어지는 이 세 명의 박사들은 현명하게도 메시야를 찾아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에게 경배, 즉 예배는 그분 앞에 엎드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예배라고 하면 으레 사적으로나 교회 모임에서 종교적 헌신을 보이는 방식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신 우리 구주를 예배하는 것에 대해 숙고했을 때, 다음 네 가지 개념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첫째, 우리의 예배를 이루는 행동. 둘째, 우리의 예배에 영향을 주는 태도와 감정. 셋째,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의 유일무이함. 넷째, 우리가 예배하는 거룩한 분들을 본받을 필요성.

첫째, 우리의 예배를 이루는 행동

매우 일반적이면서도 중요한 예배의 형태 중 하나는 헌납된 장소에 모여 헌신의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더욱 온전히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도록 나의 거룩한 날에 기도의 집에 가서 네 성찬을 바칠지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예배당을 짓는 주된 이유입니다. 하지만 필요한 경우, 어느 정도의 신성함을 갖춘다면 헌납되지 않은 장소에서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날에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물론 우리는 각자 형편에 따라 가장 좋은 복장을 합니다. 그것은 사치스럽지 않고 하나님께 존경과 경건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단정한 차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품행도 경건하고 공손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참여함으로써 예배합니다. 찬송가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름으로써 예배합니다. 서로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예배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날 곧 주의 날에는 네 죄를 네 형제들에게 그리고 주 앞에 고백하며, 네 헌물과[‘시간, 재능 또는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봉사하여 바치는 제물’을 의미함] 네 성찬을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바칠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악단처럼 즐겁게 해 주거나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기억하고 “더욱 온전히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모입니다.

가장 최근의 연차 대회에서 패트릭 키아론 장로님은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함께 모이는 것은 단지 성찬식에 참석하고 해야 할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입니다. 이 두 가지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참석은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식일을 주님과 그분의 목적에 바치는 것 자체가 예배의 행위입니다. 여러 해 전에, 당시 장로였던 러셀 엠 넬슨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합니까? 어릴 때 저는 안식일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목록을 공부했습니다. 나중에야 비로소 안식일에 보이는 나의 행동과 태도는 나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표징이라는 것을 경전에서 배웠습니다.[출애굽기 31:13; 에스겔 20:12, 20 참조]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목록은 더는 필요 없어졌습니다. 어떤 활동이 안식일에 합당한지 여부를 결정해야 할 때 단순히 저는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어떤 표징을 드리고 싶은가?’”

주님의 날에 드리는 예배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속죄 희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적절하고도 특별하게 그분의 부활을 기념합니다만, 매주 그분의 부활을 포함하는 속죄의 성찬 상징물을 취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부활을 기념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성찬을 취하는 것이 안식일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서로 가르치고, 봉사하고, 지지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예배하는 것은 특별한 힘과 유익을 줍니다. 흥미롭게도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영적인 삶을 전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영적인 성장을 우선시하거나, 신앙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거나,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가질 가능성이 낮습니다. 성도들의 공동체인 우리는 예배와 신앙으로 서로를 강화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가정에서 하는 일상의 예배 행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구주께서는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십니다. “그러할지라도 네 서약을 날마다 어느 때든지 의롭게 바쳐야 하느니라.” 현명하게도 한 자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심오한 방법이 어린 아이들을 우리 삶에 맞이하여 그들을 보살피고 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앨마와 앰율레크는 자신들의 회당에서 쫓겨난 조램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배로서의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의 골방과 너희의 은밀한 장소에서 또 너희의 광야에서 너희의 영혼을 쏟아 내어야만 하느니라.

또한 너희가 주께 부르짖지 아니할 때는, 너희 마음으로 충만하게 하여, … 끊임없이 그에게 기도하는 데 너희 마음을 기울이도록 하라.”

또한 그들은 경전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간증하고, 자비로운 행동과 봉사를 하고, 성신을 받고,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라고 말했습니다.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두 번째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배에 내재된 태도와 감정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 예배를 그저 또 하나의 의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새로운 기쁨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예물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분은 이 계명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예배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분의 삶과 속죄 희생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바쳐졌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 속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청하셨음을 통렬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때 그분은 순종적으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 계시는 그리스도.

예배는 이 완전한 모범을 따르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그분께] 희생으로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금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침례하고 당신의 은혜로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 예배 대상의 유일무이함

교리와 성약 1편에서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탄하십니다.

“그들이 나의 의식에서 벗어났으며 나의 영원한 성약을 깨뜨렸음이라.

그들은 주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주를 구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길로, 또 자기 자신의 신의 형상을 따라 걷나니, 그 형상은 세상의 모습이요.”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고 하는 세 명의 유대인 청년의 모범을 기억합시다. 그들은 리하이와 그의 가족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 환관장은 그들의 이름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바꾸었습니다. 이후에 이 세 청년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기를 거절하자, 왕은 그들을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지라고 명하며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용감한 대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풀무불 속에서 무사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풀무불은 너무나 뜨거워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그 속에 던져 넣은 사람들을 태워 죽였으나, 그 세 청년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구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었으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그들의 죽음을 막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분께 충실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에 대한 예배보다 우선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상이 됩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 즉 그분께 져야 할 모든 책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보다 어떤 단체나 대의에 대한 충성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거짓 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들도 다음과 같이 그들 자신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들이 입술로는 나를 가까이 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도다.]” 우리의 예배 대상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을 본받을 필요성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가장 훌륭하고 진정한 예배의 형태입니다. 우리의 헌신을 보인다는 것은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을 본받는 것, 즉 그분들의 속성과 성품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속담처럼 모방이 가장 진심 어린 아첨이라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을 본받는 것이 가장 진심 어린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좀 더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예배 행위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합니다. 앞서 인용한 키아론 장로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에는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약의 길,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그분께 충성하는 길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서약함으로써 그 길에 들어섭니다. 우리는 회개할 때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고 깨끗하게 하는 구주의 은혜의 사자인 성신의 은사를 받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과정에서 그분을 예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의 집에서 추가적인 신권 의식을 받고 성약을 맺으면서 우리는 더욱 성결하게 됩니다. 성전 의례와 의식은 숭고한 형태의 예배입니다.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습니다. “신권 의식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성약을 맺고 지키는 모든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접하게 됩니다.” 이 권능은 우리가 봉사하고 축복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정화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신성한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약의 길을 걸을 때, 우리 안에서 성결하게 하는 “경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도 고대의 니파이인과 레이맨인처럼 “예수[님]의 발에 엎드려, 그[분을] 경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가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경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 앞에 다른 신을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 삶에서 그분의 성품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예배의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임을 간증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