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나바로—페루”, 『성도들 이야기』(2024)
마누엘 나바로—페루
페루의 한 청년이 선교 임지에서 고난과 치유를 경험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 지혜를 배우라
1986년 초, 페루 남부의 작은 도시인 나스카에 살던 열여섯 살 소년 마누엘 나바로는 산카를로스 지부의 제사였다. 산카를로스 지부는 교회의 “기본 단위 조직”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교회가 막 들어가 회원 수가 거의 없는 지부를 위해 197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명칭이었다. 산카를로스 지부를 포함한 이런 단위 조직 중 일부에서는 청소년과 성인들이 일요일에 함께 모여 합반 모임과 정원회 모임을 했다.
마누엘은 교회 모임 세 번째 시간에 멜기세덱 신권 소유자들과 함께 모이는 것이 즐거웠다. 지부에는 약 20명의 청남 아론 신권 소유자가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청남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마누엘은 지부의 장로들과 함께 모임을 하면서 아론 신권과 멜기세덱 신권의 의무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마누엘은 교회 회원이 된 지 2년이 되었다. 그는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 이제 그의 아버지는 지부 회장이었으며, 구주를 향한 아버지의 헌신 덕분에 마누엘도 구주께 굳게 헌신하고 있었다. 마누엘은 생각했다. “아빠가 교회 안에 계시다는 건 교회가 좋은 곳이기 때문인 거야.”
그때까지, 1986년은 남미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월에는 남미 대륙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성전인 페루 리마 성전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성전이 헌납되었다. 리마에 세워진 주님의 집은 마누엘과 페루의 11만 9천 명의 후기 성도들뿐 아니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베네수엘라에 거주하는 10만여 명의 성도들이 이용했다. 리마 성전이 헌납되기 무섭게 페루인 2백 명과 볼리비아인 2백 명이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았다.
얼마 뒤 마누엘은 세미나리 2년 차를 시작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교회가 10년 넘게 전 세계로 확대해 온 프로그램이었다. 이전에 마누엘의 지부에서는 저녁에 세미나리 수업을 했었다. 그러나 1986년, 교회 교육 기구 페루 지역 코디네이터는 페루의 298개 와드와 지부 중 대부분의 단위 조직에서 매일 새벽 세미나리를 시행하게 했다. 페루의 회원들은 이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세미나리 수업이 학생들과 현지 자원봉사 교사들의 집 가까이에서 열리기를 바랐다.
처음에 마누엘은 자신의 집에서 세미나리 수업에 참석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임차한 지부 집회소로 세미나리 장소가 바뀌었다. 마누엘은 평일이면 매일 새벽 6시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약 3킬로미터를 걸어갔다. 처음에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다른 청소년들과 함께 세미나리에 가는 것이 즐거워졌다. 교사의 격려로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는 습관을 길렀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세미나리에서 마누엘은 “성구 익히기” 카드 한 벌을 받았다. 이 카드에는 전 세계 세미나리 학생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성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 해에 마누엘의 반에서는 몰몬경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배운 첫 번째 성구 익히기 구절은 니파이전서 3장 7절, “내가 가서 주께서 명하신 일들을 행하겠나이다.”였다.
세미나리 교사 중 한 명인 아나 그란다는 마누엘과 그의 반 친구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니는 영원한 가치와 운명에 대해 가르쳤다. 그녀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마누엘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간증을 얻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또래의 다른 청소년들이 겪는 많은 문제로부터 어떻게 보호받는지를 보았다. 그는 후기 성도가 아닌 친구들과 축구를 했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교회의 청소년들임을 알게 되었다. 수요일이면 그들은 “선교사의 밤”에 참석하여 그 지역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들과 어울려 재미있는 활동을 했다.
마누엘의 친구들은 그와 함께 공부했고 그를 지지했으며 그가 올바른 길에 머물도록 도와주었다. 그와 그의 사촌이 토요일 밤 파티에 갈 때면, 교회 밖 친구들도 그들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마누엘과 그의 사촌이 후기 성도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의 믿음을 존중했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선교 사업을 최우선에 두고
2년 후 4월, 마누엘 나바로는 아버지를 찾아와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페루의 리마에서 지내며 그곳의 명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하던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시 입학에 도전하려면 6개월을 더 공부해야 했다.
“마누엘, 대학 진학을 계속 준비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선교 사업을 준비하고 싶은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마누엘은 선지자가 봉사할 수 있는 교회의 모든 합당한 청년 남성들에게 선교사로 봉사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축복사의 축복문에도 선교 사업이 언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 등록한 후에 선교 사업을 나갈 계획이었다. 그는 선교 사업에 앞서 대학교에 먼저 등록해 두면 선교 사업을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시간을 두고 결정하라고 했다.
마누엘은 곧바로 몰몬경을 읽고 기도했다. 그렇게 하면서 결정을 인도하는 영을 느꼈다. 이튿날, 그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선교사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좋다. 너를 도와주마!”
마누엘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근처 은행의 직원들을 몇 명 알고 있었기에 마누엘은 자신이 은행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차에 태우고 시내에서 지부의 첫 예배당을 건축하는 현장으로 데려갔다. 그는 감독관에게 공사팀에 마누엘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물론이죠.” 감독관이 말했다. “아드님에게 일을 맡기겠습니다.”
마누엘은 6월에 공사팀에 합류했고, 급여일이 될 때마다 감독관은 수표를 건네며 선교 사업에 사용할 것을 상기시켰다. 마누엘의 어머니도 그가 수표의 금액 대부분을 선교사 기금과 십일조로 떼어 두도록 도와주었다.
선교 사업에는 큰 비용이 들었는데, 페루의 경제난으로 인해 그곳의 많은 성도들은 선교사 기금을 전액 부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년 동안 모든 전임 선교사들은 자신과 가족, 회원들, 심지어는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존하여 선교사 기금을 마련했다. 킴볼 회장이 자격을 갖춘 모든 청년 남성들에게 선교사로 봉사할 것을 촉구한 후, 교회는 회원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반 선교사 기금에 헌금하도록 권유했다.
이제 선교사 기금의 3분의 1을 현지에서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나머지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선교사들은 일반 기금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페루와 다른 남미 국가에서는 현지 회원들이 선교사들에게 매일 한 끼의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선교사들이 돈을 절약하도록 돕는 제도를 마련했다. 마누엘은 선교사 기금의 절반을 지불했고 나머지 비용은 부모가 지불하기로 했다.
마누엘은 약 6개월간 일한 후 선교사 부름장을 받았다. 아버지는 부름장을 바로 열어 봐도 좋고, 일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성찬식에서 읽어도 좋다고 말했다. 마누엘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지만, 그날 저녁 어머니가 퇴근할 때까지는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어머니가 집에 도착하자, 마누엘은 봉투를 열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의 서명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부름장의 나머지 내용을 읽기 시작했고, 한 단어 한 단어에 심장이 뛰었다. 마누엘은 자신이 페루 리마 북 선교부에서 봉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무척 기뻤다.
페루 리마 북 선교부의 마누엘 나바로, 1990년경.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그는 늘 자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싶은 소망을 품어 왔었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폭발 사고를 당하다
1990년 6월 7일 늦은 시간, 페루 우아라스에서는 마누엘 나바로와 그의 선교사 동반자 기예르모 추키망고가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누엘은 1989년 3월에 전 세계 14개 선교사 훈련원 중 하나인 리마 선교사 훈련원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페루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즐겁게 선교사로 봉사했다.
하지만 그가 현재 봉사하는 지역은 밤이면 위험할 수 있었다. ‘빛나는 길’을 의미하는 센데로 루미노소라는 혁명 단체가 10년 넘게 페루 정부와 내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페루가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경제 갈등을 겪으면서 그들은 더 저돌적인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마누엘과 기예르모는 둘 다 페루 원주민 출신으로, 매일 아침 눈앞의 위험을 깨달으며 집을 나섰다. 센데로 루미노소 같은 단체들은 교회를 미국의 외교 정책과 연관시켰기 때문에 후기 성도들을 표적으로 삼곤 했다. 이제 스페인어권 국가의 교회 회원은 100만 명이 넘었으며, 페루에는 약 16만 명의 회원이 있었다. 최근 몇 년간 혁명가들은 후기 성도 선교사들을 습격하고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집회소를 폭격했다. 1989년 5월 볼리비아에서는 혁명가들이 선교사 2명을 총살했다. 그 후로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고 교회에 대한 공격도 늘었다.
페루의 5개 선교부는 폭력 사태에 대응하여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정하고 선교 활동을 낮 시간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오늘 저녁, 마누엘과 기예르모는 기분이 좋고 말이 많았다. 그들은 방금 복음 토론을 가르쳤고 15분 정도 후면 숙소에 도착할 것이었다.
동반자와 이야기하며 걷는 동안 마누엘은 한 구획쯤 앞에 두 청년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노란색 작은 자동차를 밀고 있었는데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마누엘은 도와줄까 생각했지만, 그들은 곧 시동을 걸더니 차를 타고 떠났다.
잠시 후, 선교사들은 숙소 근처 공원에 이르렀다. 아까 그 노란색 자동차가 그들이 걷고 있는 곳에서 1.5미터쯤 떨어진 포장도로에 주차되어 있었다. 근처 군사 기지에는 파견대가 있었다.
“자동차 폭탄 같아요!” 기예르모가 말했다. 마누엘은 몇몇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았고, 그 순간 차가 폭발했다.
폭발이 마누엘을 덮쳤고, 파편이 주위를 휘감으며 그를 공중으로 내던졌다. 마누엘은 겁에 질린 채 땅에 떨어졌다. 동반자를 생각했다. ‘어디 있을까? 직격탄을 맞은 걸까?’
바로 그때, 마누엘은 기예르모가 자신을 땅바닥에서 들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폭탄의 표적이 분명한 파견대 군인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자동차의 잔해 너머로 총격을 퍼붓자 공원은 마치 교전 지역이 된 것 같았다. 마누엘은 동반자에게 기댄 채 숙소까지 남은 길을 간신히 걸어갔다.
숙소에 도착해서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니, 마누엘은 얼굴은 피투성이었지만 머리에는 상처가 없었다. 그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축복을 주세요.” 마누엘은 동반자에게 말했다. 가벼운 상처만 입은 기예르모는 떨리는 손을 마누엘의 머리에 얹고 그를 축복했다.
잠시 후 경찰이 숙소로 찾아왔다. 선교사들이 폭탄을 설치한 청년들이라고 생각한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여 경찰서로 데려갔다. 그런데 경찰관 중 한 명이 마누엘의 상태를 보더니 말했다. “이 사람 죽을 것 같아요. 의료 센터로 데려갑시다.”
경찰 의료 센터에 도착하자 경찰서장이 장로들을 알아보았다. 마누엘은 최근 경찰 서장과 침례 접견을 했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네.” 서장이 경찰들에게 말했다. “선교사들이야.”
마누엘은 서장의 보살핌을 받으며 얼굴을 씻었고 오른쪽 눈 밑에 깊게 상처가 난 것을 발견했다. 상처를 본 서장은 마누엘과 기예르모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여기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는 설명했다.
얼마 후, 마누엘은 과출혈로 의식을 잃었다. 그는 급히 수혈을 받아야 했다. 우아라스의 성도들이 헌혈을 하려고 병원에 왔지만 그들 중에는 맞는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의사들은 기예르모의 혈액을 검사했고 마누엘과 혈액형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기예르모는 다시 한번 동반자의 목숨을 구했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암흑의 나날
우아라스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 의사들은 마누엘 나바로를 리마의 한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 선교부 회장인 엔리케 이바라가 그를 맞이했고, 지역 회장단 일원인 찰스 에이 디디에 장로가 그에게 축복을 주었다. 디디에 장로는 마누엘에게 축복을 주며 그가 곧 병원을 떠나 선교 임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의사들은 마누엘의 다른 부상을 치료하고 나서 다친 얼굴을 재건하는 데 집중했다. 폭탄 파편으로 광대뼈가 쪼개지고 오른쪽 눈의 시신경이 절단되어 오른쪽 안구를 제거해야 했다. 리마에 온 마누엘의 부모는 그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아들아, 수술을 할 거란다.” 어머니가 말했다.
마누엘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눈에 통증을 느끼지 못했기에 붕대를 감은 이유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위로했다. “우리가 여기 있단다. 우린 너와 함께 있어.”
교회의 전적인 재정 지원으로 마누엘은 안구를 제거하고 손상된 안와를 복구하는 세 번의 수술을 받았다.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친척들은 그가 퇴원 후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누엘은 선교 임지를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주님과의 계약은 2년인데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마누엘이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리마에서 학교에 다니던 고향 친구 루이스 팔로미노가 문병을 왔다. 마누엘은 부상으로 인해 루이스와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지만 선교사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선교 사업을 완수하겠다는 마누엘의 결정에 놀라며 감명을 받았다.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것인지 알고 싶어.” 루이스가 말했다. “넌 어떻게 그렇게 강한 신앙을 가졌니?”
폭발 사고가 있은 지 6주 후, 마누엘은 병원을 떠나 리마에 있는 선교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테러의 위협이 있었으며, 그는 폭발 차량과 비슷한 차를 볼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밤에는 약 없이는 잠을 자기 어려웠다.
날마다 선교부 사무실의 장로들 중 한 명이 마누엘의 붕대를 갈아 주었다. 마누엘은 차마 거울로 잃어버린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병원을 떠난 지 약 3주 후, 그는 의안을 받았다.
페루에서 선교사 기예르모 추키망고(왼쪽), 마누엘 나바로, 브라이언 호스, 1991년경.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어느 날, 루이스는 마누엘을 만나러 선교부 사무실에 왔다. 그가 말했다. “침례를 받고 싶어. 뭘 해야 하니?” 선교부 사무실이 루이스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몇 주 동안 마누엘과 그의 동반자는 근처 예배당에서 루이스에게 나머지 토론을 가르쳤다. 마누엘은 친구를 가르칠 수 있어서 기뻤고, 루이스는 선교사들과 함께 세운 모든 목표를 열심히 완수했다.
1990년 10월 14일에 마누엘은 루이스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는 여전히 부상으로 힘들어했지만, 그 시련으로 인해 고향 친구에게 침례를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선교 사업에서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루이스가 물 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포옹했고, 마누엘은 강한 영을 느꼈다. 그는 루이스도 그 영을 느꼈음을 알았다.
마누엘은 루이스의 침례를 기념하며 성경책을 선물했다. 표지 안쪽에는 이런 말을 적어 넣었다. “암울한 날이 오면 새로 태어난 오늘을 기억하렴.”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주님을 신뢰하며
마누엘 나바로가 1991년 3월에 선교 사업을 마치자, 부모님은 그를 데리러 리마에 왔다. 마누엘은 스테이크가 조직된 지역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 선교부 회장이 그를 선교사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마누엘은 아직 페루 남부에 있는 고향 나스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봉사한 지역에 있는 친구에게 그녀의 침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일주일을 더 그곳에 머물렀다.
어느 날 아침, 마누엘과 그의 아버지는 아침 식사로 먹을 빵을 사러 나갔다. 아버지는 깜빡하고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돌아 다시 안으로 향했다. “여기서 기다리렴.” 아버지가 말했다.
순간 마누엘은 얼어 버렸다. 오랫동안 선교사 동반자와 함께 지내 왔기에 거리에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는 그곳에 가만히 있어 보기로 했다. ‘난 더 이상 선교사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스카로 돌아온 후에도 마누엘은 선교 사업 이후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부상 탓도 컸다. 한쪽 눈으로만 보며 악수를 하는 것은 전만큼 쉽지 않았다. 그는 계속 엉뚱한 곳에 손을 내밀곤 했다. 그러다 지부의 한 형제가 그와 함께 탁구를 하기 시작했고, 한쪽 눈으로 작고 하얀 공을 쫓아가는 것은 거리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4월에 마누엘은 대학에서 자동차 기계학을 공부하기 위해 더 큰 도시인 이카로 이사했다. 이카는 나스카에서 160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그곳에는 친구들과 가족도 살고 있었다. 그는 이모 집에 살면서 혼자 방을 썼다. 어머니는 그를 걱정하며 거의 매일 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자주 말했다. “아들아, 잊지 말고 항상 기도하렴.” 그는 괴로움을 느낄 때마다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주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카 스테이크에서는 젊은 미혼 성도들이 함께 모여 어울리도록 격려하기 위해 종교 교육원 수업을 제공하고 활동과 영적 모임을 할 수 있게 독신 성인 그룹을 두었다. 이카에서의 이런 활동과 새로운 와드는 마누엘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교회에서는 아이들은 그의 의안을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성인들은 그를 여느 회원과 다르지 않게 대했다.
어느 날, 이카 스테이크의 회장인 알렉산더 누네스가 마누엘에게 접견을 하자고 했다. 마누엘은 십 대 시절 나스카에서부터 누네스 회장을 알고 있었으며, 교회 교육 기구 코디네이터였던 누네스 회장은 그의 세미나리 수업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누엘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
접견 중에 누네스 회장은 마누엘에게 스테이크 고등평의회에서 봉사하도록 부름을 주었다.
“우와!” 마누엘은 혼잣말을 했다. 스테이크 부름에서 봉사하는 성도들은 보통 마누엘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더 풍부했다. 그러나 누네스 회장은 그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마누엘은 자신이 담당하는 와드들을 방문했다. 처음에 그는 와드 지도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닌 부름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교회 지침서를 공부하고 스테이크에 보고하면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직책에 비해 자신이 너무 어리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스테이크에서 성도들과 간증을 나누고, 영적 모임에 참석하고, 청년들에게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끔 혼자 있을 때면, 자신이 당했던 공격을 생각하면 슬프고 치가 떨리기도 했다. 경전에는 충실한 사람들이 질병에서 치유되거나 위험에서 보호받는 기적적인 이야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경전에는 바로 구출을 받지 못한 채 고통과 부당함을 겪었던 욥과 조셉 스미스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때때로 마누엘은 자신의 부상에 대해 생각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공격에서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부상을 입은 후 몇 달 동안 테러리스트들은 교회 회원과 선교사들을 표적으로 삼아 살해했으며, 이로 인해 페루 성도들 사이에 슬픔과 공포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고 있었다. 페루 정부는 테러 단속을 시작했고, 그에 따라 테러 공격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교회의 현지 성도들은 “주님을 신뢰하라”라는 운동을 시작하여 자국의 폭력에서 벗어나도록 금식하고, 기도하고, 신앙을 행사했다.
마누엘은 학업과 교회에서의 봉사가 고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님을 신뢰했고 자주 그분을 생각했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