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 이야기
노라 쿠트—홍콩


“노라 쿠트—홍콩”, 『성도들 이야기』(2024)

노라 쿠트—홍콩

홍콩의 한 젊은 여성이 회복된 복음을 나눔으로써 목적을 찾는다

교회를 다시 홍콩으로

“그에게 교회를 돌려 달라고 말하거라.”

조용하지만 다급한 음성에 열여섯 살의 노라 시우 유엔 쿠트는 놀라 어리둥절했다. “네?” 그녀는 말했다.

“그에게 교회를 돌려 달라고 말하거라.”

미소 짓고 있는 노라 쿠트의 인물 사진.

노라 쿠트의 사진, 1957년.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그 말이 다시 노라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오른쪽 귀에 귓속말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1954년 9월, 노라는 홍콩의 한 호텔 밖에 혼자 서 있었다. 미국에서 온 방문자 몇 명이 방금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고, 그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방문자들은 동아시아를 여행하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 지역에는 10억 명이 넘는 사람이 살았지만 그중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겨우 천 명에 불과했다. 중국의 사회 불안과 인근의 한국 전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1951년에 선교부를 폐쇄한 뒤로 홍콩에서는 몇 년째 공식적인 교회 조직이 부재했다. 그러나 이제 분쟁은 끝났고, 방문자들은 노라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다른 열여덟 명의 성도를 살피러 온 것이었다.

방문단의 인솔자는 교회 십이사도 정원회의 선임 사도인 해롤드 비 리 장로였다. 노라는 그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그 이유를 알 만큼 교회 본부의 지도자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귓전에 속삭이던 그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버스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버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 사도님!”

리 장로가 열린 창으로 손을 내밀자, 노라는 그 손을 잡았다. “제발 교회를 돌려주세요.” 그녀는 소리쳤다. “저희 성도들에게 교회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는 것과 같아요. 저희는 영적인 음식을 취해야 해요.”

사도는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형제님들에게 보고하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는 노라에게 기도하고 신앙을 지키라고 당부하며 그녀 같은 충실한 성도들이 있는 한 교회는 홍콩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 말이 끝나자 버스가 기어를 바꾸더니 덜커덩거리며 그곳을 떠났다.

여러 달이 지났지만 노라는 교회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이따금 소식이 오기는 할까 의문이 드는 때도 있었다. 후기 성도 선교사들은 홍콩에서 늘 고군분투했다. 장로들은 1850년대에 그곳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질병, 종교, 문화 차이, 가난, 언어 장벽 등으로 인해 불과 몇 달 만에 침례 한 명 못 주고 선교 사업을 포기했다. 그다음 선교사들이 온 것은 1949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교 사업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기간에 노라와 그녀의 두 여동생은 홍콩에서 교회에 들어온 최초의 중국인이 되었다. 그들의 가족은 중국 본토의 불안한 상황을 피해 수십만 난민 무리에 섞여 영국 식민지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거리에 선교 본부가 있었다. 노라의 새어머니는 딸들이 영어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이면 무엇이든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에 매일 아침 그들을 그곳으로 보냈다.

노라는 자신이 영어를 배우도록 도와준 중국계 하와이인 선교사 사이 랑 아키 자매의 성경 수업을 아직 기억했다. 노라는 그때 회복된 복음에 대해 증거를 얻었다. 선교 사업이 중단된 홍콩은 마치 해가 사라진 곳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간증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다. 신권 의식, 성찬식, 집회소, 중국어로 된 교회 출판물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굳건히 매달렸다.

리 장로가 방문한 지 거의 1년이 지난 1955년 8월, 키 큰 금발 청년이 노라가 일하는 영화관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한눈에 그랜트 히튼을 알아보았다. 히튼은 홍콩에서 선교부가 폐쇄되기 전에 선교사로 봉사했던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루아나는 새로 설립된 극동 남부 선교부를 열기 위해 막 홍콩에 도착한 터였다.

노라는 몹시 기뻤다. 리 장로는 그녀가 바라던 대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홍콩의 성도들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사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에 홍콩에서의 선교 사업 재개를 권했고 심지어 교회 연차 대회에서도 노라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교회 회장인 데이비드 오 맥케이는 그랜트에게 홍콩, 대만, 필리핀, 괌 등의 지역을 포괄하는 새로운 선교부를 이끌라는 부름을 주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어.’ 노라는 생각했다. ‘홍콩 성도들에게 다시 아침이 찾아왔어!’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성전을 꿈꾸다

1957년, 극동 남부 선교부는 새로운 선교사가 절실했다. 홍콩에서 봉사하던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이 건강상 이유로 막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래서 선교부에 예상치 못한 공석이 생겼던 것이다. 남아 있는 자매들에게 곧장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그랜트 히튼 회장은 노라 쿠트를 현지 전임 선교사로 불렀다.

지난 2년 동안 노라는 선교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히튼 가족은 처음 홍콩에 도착해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연락하기 위해 노라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선교 본부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노라는 히튼 부부의 아이들을 돌봐 주는가 하면, 선교사들에게 광둥어와 표준 중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리고 루아나 히튼과 함께 도시의 어린이들을 위해 주일 학교 수업에서 성경 이야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랜트 히튼이 루아나 히튼 옆에 서서 아기를 안고 있다. 모두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랜트와 루아나 히튼, 그리고 부부의 아들, 1956년경.

노라는 선교사 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또 다른 현지 성도인 리 나이 켄이라는 장로는 홍콩에서 단기 선교 사업을 했으며, 히튼 회장은 열정적으로 더 많은 현지 성도들을 선교사로 불렀다. 북미 출신 선교사들은 중국어와 현지 문화를 배우는 것을 어려워하는 일이 많았다. 도시의 많은 사람이 외국인을 의심스러워했고 장로들을 미국 정부의 요원들과 혼동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노라와 중국 성도들은 이미 현지 문화를 알았고 언어 장벽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가르친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졌다. 중국 본토에서 온 난민이었던 노라는 주택과 일자리가 부족한 혼잡한 도시에서 삶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다.

홍콩에 있는 많은 교회 회원과 예비 성도들은 난민이었으므로, 히튼 회장은 그들에게 영적 복지를 제공할 방법을 모색했다. 1952년에 교회는 개종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 회원이 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일곱 가지 공과, 즉 토론을 도입했다. 히튼 회장과 그의 선교사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 기본적인 것만 알고 있는 많은 홍콩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현지의 필요에 맞는 17개 복음 공과를 개발했다. 이 공과들에서는 신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와 의식, 회복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개종자들은 침례를 받은 뒤에 새로운 회원을 위한 20개의 추가 공과를 들었다.

선교사로 성별되기 전날 밤, 노라는 생생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주변이 온통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분주한 거리에 서 있었는데, 아름다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고 즉시 평안과 고요를 느꼈다. 건물 안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노라는 그들 중 몇 사람이 지금 홍콩에서 봉사하는 선교사임을 알아차렸다.

다음 날 노라는 선교 본부에 자신의 도착을 알리며 장로들에게 그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성전이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는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홍콩의 첫 교회 무도회

1959년 초, 노라 쿠트 자매와 그녀의 선교사 동반자인 일레인 서먼은 홍콩 북동부의 시골 지역인 타이포의 후기 성도 청소년들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그날 저녁 시내의 세낸 회관에서 교회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청소년들은 무도회를 앞두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은 모두 교회의 새로운 회원이었으며, 그 도시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도회에 가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청소년들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노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홍콩에서 열린 교회의 첫 번째 ‘금록 무도회’에 가는 길이었다. 교회 상호향상회의 공식 색상인 금색과 녹색에서 이름을 따온 ‘금록 무도회’는 1920년대부터 후기 성도 청소년, 특히 청남 및 청녀 상호향상회가 잘 확립된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연례 행사였다. 무도회는 청소년들이 교회의 다른 회원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므로, 미국 선교사들은 이 전통을 중국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했다. 마침내 지난 한 해 동안, 홍콩의 교회는 회원 수가 9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홍콩 시가

홍콩 거리 모습, 1956년경.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사진 촬영: 스탠리 시미스키)

도시까지는 기차로 약 1시간이 걸렸다. 노라와 일레인, 그리고 타이포의 청소년들이 무도회장에 도착했을 때, 미국 선교사들로만 구성된 선교부의 상호향상회 임원회는 미국의 ‘금록 무도회’ 같은 무도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를 마쳐 둔 상태였다. 천장에는 금색과 녹색의 장식용 테이프가 아치형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무도장 위로는 높이 매달린 5백 개의 풍선이 저녁이 끝날 무렵 당기면 풀리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다과로는 쿠키와 펀치(물, 설탕, 우유, 레몬, 향료 등을 넣어 만드는 음료—옮긴이)가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무도회가 시작되자 무언가 어색해 보였다. 전축에 확성기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인기 있는 춤곡을 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주최 측이 무도회장에 마련한 의자는 몇 개에 불과했다. 좌석이 부족하면 청소년들이 무도장으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통하지 않았다. 춤을 추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얼마 후, 몇몇 홍콩 성도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선교사들은 현지인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중국 성도들은 사람의 음성이 들어간 노래를 원했는데, 선교사들은 악기만으로 된 곡을 틀었던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선교사들은 틀지 않은 느린 왈츠, 차차차, 맘보에 맞춰 춤추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음악이 바뀌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무도장으로 몰려가 춤을 추었다.

시작은 순조롭지 못했지만 ‘금록 무도회’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무도회가 다 끝나지 않은 시점에 누군가 머리 위 풍선 끈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아래 있던 청소년들에게 우수수 풍선이 떨어져 내렸다. 무도회가 끝났다고 생각한 중국 성도들은 재빨리 문으로 향했다. 선교사들은 폐회 기도라도 할 수 있게 그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려고 했지만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도장을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노라는 저녁 내내 타이포의 성도들이 그 지역의 다른 청소년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그때까지 타이포에서의 봉사는 그녀의 선교 사업에서 최고의 시기 중 하나였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 그녀는 간증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금록 무도회’가 있은 지 몇 달 후, 그녀는 이제 다른 곳으로 갈 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다. 히튼 회장이 그녀를 동쪽으로 650킬로미터 떨어진 섬 대만으로 보낸 것이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피 부인과의 티타임

노라 쿠트는 1959년 7월 말에 대만에 도착했다. 히튼 회장이 최초의 후기 성도 선교사들을 대만에 보낸 지 약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회원 수가 300명을 넘지 않는 대만의 교회는 홍콩의 교회만큼 규모가 크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이 섬에서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중국인 난민들 중에서 가르칠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표준 중국어는 노라가 쓰는 말이기도 했다.

데지 클레그와 노라 쿠트가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다.

데지 클레그와 노라 쿠트, 1959년경.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새로운 지역에 익숙해진 노라와 그녀의 동반자 데지 클레그는 대만 최고 입법 기관의 일원인 피 이슈 부인을 방문했다. 피 부인은 노라 새어머니의 동창이었다. 노라의 새어머니는 자신의 옛 친구 앞으로 소개장을 써 주었다. 노라는 교회가 대만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축복을 피 부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노라와 데지가 피 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 소개장을 보여 주자, 부인이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름다운 찻잔이 나왔고, 피 부인은 손님들에게 얼그레이 차를 권했다.

그런 차를 마시는 것은 지혜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 문화에서는 주인이 내주는 차를 대놓고 거절하는 것이 무례한 일임을 노라는 알았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선교사와 회원들은 차가 나오면 마시지 않고 정중하게 피하는 방법을 궁리해 냈다. 예를 들어, 사교 예절에 정통한 홍콩의 중국 성도인 코닐 찬은 선교사들에게 일단 차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옆에 두라고 권했다. 그는 장담했다. “중국 사람들은 절대로 친구에게 차를 마시라고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노라와 데지는 정중하게 차를 거절하고, 자신들은 국가에 충실하고 지역 사회에서 좋은 구성원이 될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대만에 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피 부인은 계속 차를 권했다.

마침내 노라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저희는 차를 마시지 않습니다.”

그 말에 피 부인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왜죠?” 부인이 물었다.

“교회에서는 건강한 몸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지혜의 말씀이라는 원리를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노라는 대답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교회의 회원들은 커피, 차, 술을 마시지 않으며 담배나 아편 같은 마약도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 시기에 교회 지도자들과 여러 출판물에서는 습관성 물질이 든 다른 음료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었다.

피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무엇을 마실 수 있나요?” 부인이 물었다.

노라가 말했다. “우유, 물, 오렌지 주스, 세븐업, 탄산음료 등 마실 수 있는 건 많답니다.”

피 부인은 시중드는 사람에게 찻잔을 치우고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우유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대만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며 말했다. “나는 우리 국민이 지역 사회에서 더 나은 시민이 되고, 더 건강하고 충실한 구성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후 여러 날, 여러 주 동안 노라는 많은 사람에게 회복된 복음을 전했다. 기독교인 중국인이 교회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불교도와 도교도들 중에서도 교회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만 사람들 중에는 무신론자로 기독교나 교회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국어로 된 몰몬경이나 기타 교회 출판물이 없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대만에서는 교회가 더디게 성장했지만,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침례받을 때 맺은 성약의 중요성을 아주 잘 이해했다. 그들은 후기 성도가 되기 위해 선교사 토론을 모두 완수하고, 주일학교와 성찬식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두 달 이상 지혜의 말씀과 십일조의 법에 순종하고, 그 외 다른 계명들도 충실히 지켜야 했다. 선교사들을 만나는 대만 사람들은 침례 날짜를 정할 무렵이면 이미 지부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섬에서 노라가 맡은 중요한 책임 중 하나는 상호부조회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최근까지 대만의 모든 상호부조회를 이끈 주체는 미국인 장로들이었다. 이런 상황은 1959년 초에 히튼 회장이 베티 존슨이라는 선교사를 보내 상호부조회를 조직하고 타이베이와 섬의 다른 도시들에서 여성 지도자들을 훈련하게 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노라와 그녀의 동료 자매 선교사들은 베티가 한 일을 이어받아 각 지부를 다니며 상호부조회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했다.

노라의 선교 사업은 1959년 10월 1일에 마무리됐다. 선교사로 봉사하는 동안 그녀는 복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신앙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홍콩과 대만에서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선지자 다니엘의 꿈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했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

성전에 대한 꿈이 이루어지다

1992년 10월에 홍콩 성전 건축이 발표되자 노라 쿠트 주는 무척 기뻤다. 그녀가 극동 남부 선교부에서 봉사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그녀는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레이먼드 주라는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네 자녀를 길렀다. 하지만 그녀는 홍콩에서 초창기에 교회로 개종한 중국인으로서 그곳에서 했던 경험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레이먼드는 온 가족이 성전 헌납식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노라가 말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레이먼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 해요.”

가족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으며, 주님의 집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1963년에 미국으로 이민할 때 먼저 하와이에 들러 라이에 성전에서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았다. 나중에 그녀와 레이먼드는 로스앤젤레스 성전에서 인봉되었고, 그 후 얼마 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 있는 그들의 집 근처에 오클랜드 성전이 헌납되었다. 마침내 노라와 레이먼드는 오클랜드 성전의 봉사자가 되었고, 노라는 표준 중국어, 광둥어, 몽족어 및 기타 언어로 성전 의식을 집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5월에 홍콩 성전이 완공된 후, 교회는 2주간 일반 공개를 했다. 노라는 가족과 함께 성전 헌납식 사흘 전인 5월 23일 저녁에 홍콩에 도착했다. 노라는 공항에서 나오면서 온몸으로 후끈하고 습한 공기를 느꼈다.

“홍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다음 며칠 동안 노라는 가족을 데리고 시내를 관광했다. 큰딸 로린도 홍콩에서 선교 사업을 했기에 그들은 함께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하게 되어 기뻤다. 노라가 한때 알았던 거리와 건물들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자, 그들이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녀가 그들을 데리고 간 첫 번째 장소 중 한 곳은 성전이었다. 성전은 그녀가 젊었을 때 많은 시간을 보냈던 옛 선교 본부 자리에 세워졌다. 노라는 그 장소가 그토록 성스러운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더없이 기뻤다.

5월 26일 일요일 아침, 가족은 노라의 선교부 회장이었던 그랜트 히튼과 극동 남부 선교부에서 봉사했던 다른 옛 선교사들과 함께 특별 성찬식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히튼 회장과 선교사들은 간증을 했다. 노라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일어서서 간증했다. “제 안에서 영이 불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땅과 이 선교부의 산물입니다. 그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날 아침, 노라와 그녀의 가족은 홍콩 성전 해의 왕국실에 함께 앉았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모임을 시작하고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 장로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노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인생을 한 바퀴 돌아 시작점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42년 전, 그녀는 홍콩에서 해롤드 비 리 장로에게 교회를 돌려 달라고 간청했었다. 당시 홍콩의 성도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제 홍콩에는 주님의 집이 있고,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모임을 마치면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헌납 기도문을 낭독했다.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여 이곳에 있는 당신의 많은 아들과 딸들의 삶을 축복했습니다. 저희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당신과 맺은 성약에 참되고 충실한 모든 이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 지역에 있는 당신의 교회는 이제 이 성스러운 성전의 헌납으로 완전히 성숙해졌습니다.”

다 함께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을 부르는 동안 노라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폐회기도가 끝나자,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을 끌어안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저녁, 노라의 가족은 귀환 선교사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라가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조용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경심으로 그녀를 맞이했고, 가족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경외감을 느꼈다.

노라가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 노인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를 기억하나요?” 그가 물었다.

노라는 그를 쳐다보았고 누군지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그녀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만났던 선교사 중 한 명인 해럴드 스미스였다. 노라는 자녀들에게 해럴드를 소개했다.

“내가 한 일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가 말했다. 그는 노라가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어떻게 잊겠어요.” 노라가 말했다.

주석 및 출처 인용은 복음 자료실에서 전문을 참조한다.